- 조은교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연구실 연구위원
미·중 경쟁은 관세와 핵심기술을 둘러싼 통상·기술 압박의 제1라운드를 지나, 피지컬 AI 시대의 글로벌 AI 생태계 선점과 산업 아키텍처의 표준화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 중국은 AI·공급망 전략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첫째, 미국의 수출통제의 실효성이 약화되는 사이, 수요시장 레버리지와 독자적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둘째, UN 산업분류상 공업 전 부문을 갖춘 유일한 국가로서 전통 제조업까지 고도화하기 위해 AI 적용을 추진함으로써 제조업 전반을 전략자산화하고 있다. 셋째, 피지컬 AI를 앞세워 제조·공정 기반 표준의 글로벌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미·중 경쟁의 제2라운드에 대응하여 우리 역시 단순한 수세적 공급망 다변화를 넘어선 새로운 대응 전략이 요구된다. 한국의 대응 전략으로는 고난도 공정의 판단 데이터를 학습한 제조 LLM과 초크포인트 자산을 수직 결합하는 K-제조 아키텍처의 구축, 전통 주력산업의 AI화를 통한 K-소재산업의 고도화, 그리고 기술·생산능력·표준·현장 데이터에 걸친 개별 강점을 하나의 자산 체계로 묶어내는 K-제조의 아키텍처 자산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렇게 육성된 대체불가 자산을 매개로 한국이 부품 공급자를 넘어 주요국 기술 생태계의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의 고도화를 병행해야 한다.
이에 본지에서는 미·중 경쟁 2.0의 구조와 중국의 AI·공급망 전략 변화를 분석하고, 한국 산업의 대응 전략을 제시한 조은교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연구실 연구위원의 ‘미·중 경쟁 2.0, 중국의 AI·공급망 전략 변화와 우리의 대응: K-제조 대체불가성의 전략적 육성과 활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미·중 경쟁 2.0: 관세 전쟁에서 AI 생산 질서 주도권 경쟁으로
미·중 패권 경쟁은 관세와 무역적자를 둘러싼 제1라운드 통상 압박의 시대를 지나, AI 표준의 주도권과 제조업을 기반으로 글로벌 생산질서의 통제력을 겨루는 구조적·장기적 경쟁인 ‘미·중 경쟁 2.0’으로 전면 이행하고 있다.
2026년 7월 17일 상하이 세계인공지능대회 (WAIC)에서 발표된 시진핑 주석의 기조연설은 글로벌 AI 가치사슬의 주도권 경쟁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음을 공표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시 주석은 자국 AI 생태계의 독자적 확 장과 함께 국제 협력을 제안하며, 딥시크 등 오픈소스 모델을 통해 세계 표준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29개국이 참여하는 중국 주도의 AI 협력기구인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AICO)도 이날 발족됐다.
특히 최근 본격화된 중국의 독자적 오픈소스 생태계의 확산과 다자간 AI 협력 기반의 구축은 경쟁의 단위가 기존 반도체 등 개별 품목의 접근 제한을 넘어선 글로벌 AI 생태계 선점과 산업 아키텍처의 표준화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시진핑 주석이 연설에서 안전하고 통제 가능한 AI 발전과 글로벌 거버넌스 구축을 강조한 것은 기술 경쟁을 넘어 규범 경쟁의 주도권까지 겨냥한 신호로 읽히며, 미·중이 오는 9월 첫 AI 대화를 개최할 예정인 만큼 AI 표준과 거버넌스를 둘러싼 양국의 경쟁과 협상은 더욱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가치사슬에 깊이 편입된 제조강국이자 수출주도형 국가인 한국에 구조적 위기와 전략적 기회를 동시에 제기한다. 당초 미국의 수출통제 의도와 달리 중국의 자립과 세력권 확장이 가속화되면서 AI 시대의 글로벌 공급망은 더욱 블록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본고는 미·중 경쟁 2.0의 구조와 중국의 AI·공급망 전략 변화를 분석하고, 한국 산업의 대응 전략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중국의 AI·공급망 전략 변화와 함의
(1) 미국 반도체 수출통제의 역설과 중국의 자립 생태계 구축
미·중 경쟁 2.0에서 가장 뚜렷한 변화는 미국 반도체 수출통제의 역설과 그 실효성의 약화이다. 통제가 중국에 시간과 명분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공급 차단은 중국의 자립화를 재촉했고, 중국이 수요시장을 협상 카드로 쓸 공간을 열어 주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12월 그동안 수출을 금지했던 H200의 대중 판매를 허용했고, 2026년 5월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 직전에는 엔비디아 젠슨 황 CEO를 막판에 에어포스원에 합류시키는 파격적 제스처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자국 내 AI칩 국산화를 위해 수입통제를 감행하면서 지난 5월 정상회담 당시 기준, 중국의 대표적인 테크기업 어느 곳도 H200을 인도받지 못했다.
엔비디아의 대중국 시장 점유율은 95%에서 사실상 제로로 떨어졌다. 즉, 미국의 수출통제 무기가 중국의 수입통제로 역전되어 도리어 중국에 유리한 판을 만들어 주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이 국면에서 세계 최대 반도체 수요시장이라는 지위를 지렛대로 삼아, 무엇을 언제 살지 스스로 통제하는 수요 거버넌스로 판의 주도권을 쥐어 가고 있다.
또한 중국은 대외 통제로 가로막힌 기술적 병목을 정면 돌파하기보다 기술 경로를 다변화하여 우 회하는 ‘시스템 중심의 대안적 자립 경로’를 구축하고 있다. 글로벌 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초크포인트(Choke Point)이자 미세공정 고도화의 필수재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접근이 봉 쇄되자 장비 확보 자체에 집착하는 대신 EUV 미세화 공정을 대체할 수 있는 구조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대표 사례가 화웨이의 독자 아키텍처 전략이다.
화웨이는 미세공정의 물리적 한계를 회로 설계와 시스템 차원에서 우회한다. 무어의 법칙이 트랜지스터를 더 작게 새겨 넣는 ‘공간의 미세화’를 추구했다면 화웨이는 신호 전달 경로와 시간을 최적화하는 접근으로 방향을 틀었다. 2026년 5월 전기전자공학자협회 회로 및 시스템 국제 심포지엄(ISCAS)에서 화웨이가 발표한 ‘타우(τ) 스케일링 법칙(Tau Scaling Law)’ 기반의 독자적 아키텍처 재편 전략이다. 회로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3차원 적층과 첨단 패키징을 결합해 EUV 없이 구형 DUV 장비만으로도 최첨단에 근접한 성능을 끌어내려는 것으로, 하드웨어의 부족분을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설계로 메우는 셈이다.
단일 칩의 미세공정 성능에서는 미국·대만에 뒤지더라도 칩을 묶어 시스템 단위로 성능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프트웨어 생태계까지 결합된다. 화웨이는 엔비디아의 CUDA(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에 맞서 독자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키우고 있다. 화웨이의 CANN(Compute Architecture for Neural Networks)은 화웨이 어센드(Ascend) AI 가속기와 연산 모델 사이를 매개하며, 딥러닝 커널 최적화 및 연산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하드웨어 제약을 소프트웨어 연산으로 보완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AI 모델들이 국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조합 위에서 구동되면서 ‘국산 모델- 국산 소프트웨어(CANN)-국산 칩’이 서로를 끌어 올리는 선순환이 형성되고 있다. 미국의 통제가 오히려 중국식 독자 생태계의 자생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은 공급망의 뿌리, 즉 소재·부품·장비(소부장)와 메모리를 국산으로 채워 넣고 있다. 우회 설계에 성공하더라도 이를 실제로 찍어낼 장비와 소재, 그리고 양산할 메모리가 없으면 자립은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첨단 노광장비를 제외한 상당수 중저위 공정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가 진전되었다. 번스타인 리서치(Bernstein Research, 2026)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의 세계 시장 점유율(생산능력 기준)은 2020년 3%에서 2025년 약 28%로 급증했으며, 2026년에는 32%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불과 수년 만의 변화다. 메모리에서는 창신메모리(CXMT)가 글로벌 DRAM 시장 4위로 부상한 가운데, NAND 분야에서는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가 대규모 팹 증설을 통해 2027년까지 캐파(Capa)를 두 배 이상 확장하는 공세적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선도기업들이 고 마진 AI용 HBM(고대역폭 메모리) 및 최선단 공정으로 자원을 집중하는 사이, 자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바탕으로 범용(Legacy) DRAM 및 NAND 시장의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처럼 레거시 반도체 분야에서 확보한 가성비 기반의 대량 공급 능력과 공급망 내재화는 향후 글로벌 범용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의 통제력과 가격 결정력을 강화하는 결정적 지렛대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2) 중국의 AI 적용을 통한 전통 제조업 고도화 전략
두 번째 변화는 전통 제조업의 고도화를 통한 제조업의 전략자산화이며, 그 함의는 경쟁의 공수(攻守) 구도 전환이다. 그간의 미·중 경쟁은 미국이 통제와 제재로 공세를 취하고 중국이 방어하는 구도였으나, 중국이 전통 제조업까지 고도화하면서 이제는 중국이 제조 기반을 지렛대로 공세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전략 토대는 제조업 공급망의 완결성이다. 중국은 UN 산업분류상 공업 전 부문을 모두 갖춘 세계 유일의 국가이며, 세계 제조업 부가가치의 약 30%를 차지한다. 제15차 5개년규획(이하 15·5 규획)에서 전통산업의 고도화를 가장 강조한 점은 전통 산업을 공급망 안정과 산업안보를 지탱하는 전략 자산으로 재정의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전통 제조의 고도화 전략은 선언에 그치지 않고, AI를 전통 제조업 현장에 적용하는 구체적 실행 조치로 뒷받침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공업정보화부와 국가데이터국이 2026년 4월 발표한 「2026년 ‘모델·데이터 공진’ 행동」이다. 철강·석유화학·비철금속 등 전통산업을 우선 대상으로 선정하였으며, 실제로 확산 가치가 높고 기술적 실현 가능성이 큰 AI 응용 시나리오를 대거 발굴하고, 제조업 고유의 기술 원리를 담은 업종별·전용 모델과 특화 에이전트를 개발하는 것이 골자이다.
목표는 2026년 말까지 ‘데이터-모델-현장 응용’의 상호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 AI가 제조업 고도화를 뒷받침하도록 하는 데 있다. 실제로 중국 정보통신연구원(CAICT)의 추산에 따르면 중국의 생산·제조 분야 AI 모델 응용 사례 비중은 2024년 19.9%에서 2025년 25.9%로 상승하였으며, AI 적용의 분야는 인터넷, 사무 등의 서비스 영역에서 제조업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은 방대한 제조 기반과 현장 데이터, 그리고 그것을 순환시키는 AI 체계를 결합함으로써 전통산업을 구조조정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자산으로 여기고 있다. 통제받는 첨단 영역에서의 자립화와, 통제 밖 전 통 제조업의 고도화가 맞물리면서 중국의 제조업 기반 전체가 경쟁의 지렛대로 재편되고 있다.
(3) 피지컬 AI 표준 선도 전략
미·중 간 경쟁이 제조업을 중심으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전장은 피지컬 AI(Physical AI) 분야이다. 시진핑 주석은 2026년 7월 17일 세계인공지능대회(WAIC) 기조연설에서 AI가 디지털 세계에서 물리 세계로 이행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이를 전통산업 개조와 미래산업 선점의 역사적 기회로 규정하였다.
AI 경쟁이 모델 성능을 겨루던 단계를 지나, 누가 AI로 실물경제를 먼저 장악하는가를 겨루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중국이 이 전환을 우연히 맞이한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해 온 흐름이라는 점은 2025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정부업무보고에서 중국식 피지컬 AI인 ‘구신지능 (具身智能)’을 처음으로 미래산업으로 명기하고 휴머노이드 로봇 관련 산업 육성정책에 착수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2026년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산업은 ‘기술 탐색’ 단계에서 벗어나 ‘상업적 대량 생산 및 실제 적 용’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 중국은 전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제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2026년 7월 기준 휴머노이드 로봇 제조업체가 140개 이상, 제품 종류가 400여 개에 이른다.
따라서 피지컬 AI의 승부를 가르는 것이 모델의 지능이 아니라 지능을 구현할 제조 기반과 적용 현장의 규모라면, 이 영역에서는 중국이 미국보다 우위에 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목할 부분은 중국식 피지컬 AI의 성격이다. 미·중 피지컬 AI 특허 비교 분석(LENS, 2023~2025년)에 따르면 양국의 전략은 특허의 언어에서부터 달라진다.
중국 특허는 지능형 제어, 시스템 통합, 효율 개선 등 산업 현장 중심의 어휘를, 미국 특허는 학습 아키텍처, 일반화, 연속 학습 등 모델과 학습 구조 중심의 어휘를 사용한다. 미국이 로봇을 지능을 구현하는 모델의 집합체로 정의한다면, 중국은 로봇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시스템으로 규정하며 AI를 산업 인프라의 운영 기술(OT)로 흡수한다. 출원 주체도 미국은 민간 주도, 중국은 국유·지방계 기업과 대학 주도다. 양국의 경쟁은 기술 성능의 우열이 아니라 어느 기술 층위를 지배할 것인가, 곧 산업 적용 방식의 경쟁으로 전개되고 있다(<표 1> 참조).
이 차이의 함의는 표준 경쟁의 경로에서 드러난다. 중국은 범용 모델의 깊이를 극대화하기보다 충분히 작동하는 AI를 제조·물류 현장에 대규모로 투입하고, 제어 구조와 작업 흐름 같은 운영 로 직을 반복 구현하면서 작업 표준(workflow standard)을 만들어 간다. 중국에서 검증된 시스템이 글로벌 사우스에 현장 패키지 형태로 이전되면서 국제 표준으로 명문화되지 않고도 중국의 제조·공정 기반 표준이 로봇과 함께 글로벌 산업 현장의 사실상 기준으로 확장되는 경로다.
이러한 운영 로직이 한 번 채택되면 교체 비용이 매우 높은 기술적 고착(lock-in)이 발생하고, 로봇의 행동 로직과 업데이트 권한을 누가 통제하는가라는 운영 주권(Operational Sovereignty)의 문제가 뒤따른다. 즉 피지컬 AI 경쟁의 본질은 단순한 로봇 기술 경쟁이 아니라, 피지컬 AI 시대에 제조업 작동 방식을 누가 정의하고 통제하느냐를 둘러싼 경쟁이다. 결국 중국은 단품 칩이나 모델 성능의 열세를 글로벌 제조업 현장 실증을 통해 극복하고, 자국 주도의 작업 표준과 운영 로직을 ‘사실상의 국제 표준(de facto standard)’으로 확장함으로써 피지컬 AI 시대의 글로벌 생산 아키텍처를 선점하겠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3. 우리의 대응: K-제조의 대체불가성 확대와 능동적 자산화
미·중 패권 경쟁의 전장이 단품 기술 제어에서 실물 제조 생태계의 주도권 경쟁으로 이동함에 따라 글로벌 가치사슬(GVC)에 깊이 편입된 우리 나라 제조업에도 새로운 AI·공급망 전략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면적 지각변동 속에서 기존의 수세적 공급망 다변화 정책이나 메모리 수혜에 안주하는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대응의 요체는 K-제조의 고유한 제조 강점에 기반한 K-제조 대 체불가성(Indispensability)의 심화와, 기술·생산 능력·표준·현장 데이터에 걸친 개별 강점을 하나의 자산 체계로 묶어 대외 협력의 기반으로 전환하는 능동적 자산화(Active Assetization), 곧 K-제조의 아키텍처 자산화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지금은 AI가 촉발한 시장 수혜에 안주할 시기가 아 니라, 대체불가성을 심화하고 능동적으로 자산화하여 블록화된 공급망의 대체 불가능한 상수로 도 약해야 하는 골든타임이다. 변화하는 생산질서 속에서 우리 산업의 지위를 주체적으로 재설계하는 구조적 접근이 요구된다.
(1) K-제조 피지컬 AI 전략: 로봇을 넘어 제조 아키텍처로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나 중국과 같은 거대 내수시장 기반의 완결 형 공급망 생태계를 그대로 구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의 전략은 수십 년간 축적한 공정 기술과 유연 생산 시스템을 바탕으로 글로벌 생산질서 안에서 대체 불가능한 핵심 초크포인트를 점 유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HBM 등 첨단 메모리와 선단 파운드리 공정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국가도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려우며, 이것이 우리 산업의 가장 큰 전략적 자산이다. 다만 단품의 우위는 시간이 갈수록 침식될 수 있는 만큼, HBM 우위를 차세대 반도체 주도권으로 연결하고 취약한 팹리스·EDA·AI 소프트웨어를 국가 전략자산으로 육성해 K-반도체의 빈 고리를 메워 나가야 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전장은 피지컬 AI 분야이다. 그 본질은 로봇이라는 완제품이 아니라, 산업 현 장의 지각·판단·실행 루프가 자동화에서 자율화로 이행한다는 데 있다. 자동화가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단계라면 자율화는 현장의 판단 자체를 기계에 위임하는 단계이며, 경쟁의 본질은 어떤 판단을 누구의 모델에 맡길 것인가라는 실행 논리의 통제권 문제로 바뀐다. 따라서 피지컬 AI 전략을 휴머노이드 등 로봇 완제품 경쟁으로 좁혀서는 안된다.
양질의 데이터 수집, 플랫폼 구축,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넘어 우리만이 쥘 수 있는 병목을 식별할 필요가 있다. 이 병목은 피지컬 AI를 구동하기 위한 판단 데이터다. 초정밀 반도체 공정,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 조업, 조선 건조 같은 고난도 공정에서 수십 년간 축적된 조업 판단과 암묵지는 인터넷 텍스트처럼 긁어모을 수도 시뮬레이션만으로 합성할 수도 없다. 이 판단 데이터를 학습해 공정의 자율 운전을 구현하는 모델이 곧 제조 LLM(한국형 제조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작업 스킬을 학습하는 범용 모델의 층위를 넘어, 제조 LLM을 한국이 이미 쥐고 있는 초크포인트 자산인 HBM 등 AI 메모리와 고부가 소재, 정밀 장비·부품, 지능형 제어 미들웨어와 수직적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K-제조 아키텍처가 완성될 수 있다. 아울러 이때 아키텍처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건은 실증 무대다. 정부가 생태계의 설계자이자 최초 수요자가 되어 공공·산업 현장을 제조 LLM의 실증 시나리오로 개방하고, SW-HW 기업이 연합한 컨소시엄 위에서 제조 LLM과 초크포인트 자산의 결합을 검증하는 체계를 갖출 때, K-제조 아키텍처는 설계도를 넘어 작동하는 자산이 된다.
(2) 전통 주력산업의 AI화: K- 소재산업의 고도화
K-제조 대체불가성의 전선은 첨단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의 공세가 향후 빠르게 진행될 영역은 오히려 철강·석유화학·섬유 등 전통 소재 산업이다. 중국은 15·5 규획에서 전통산업을 전략 자산으로 재정의한 데 이어, 이를 피지컬 AI와 결합하는 산업 지능화를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2026년 1월 공업정보화부 등 8개 부처가 「AI+ 제조 실시의견」을 발표한 이후 철강의 고로 조업부터 석유화학의 공정 운전, 기계·장비의 설계와 품질 검사, 섬유의 방적·염색에 이르기까지 업종별 AI 빅모델이 생산 공정 단위로 이식되고 있다.
따라서 전통 주력 제조업은 버려야 할 부담이 아니라 K-제조 피지컬 AI 전략의 토대이며, 별도의 구조조정 과제가 아니라 피지컬 AI 전략의 하위 축으로 통합해 추진해야 한다. 첫째, 전통산업을 제조 LLM의 학습 원천이자 첫 적용의 전장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 주력산업에서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공정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조업 판단과 암묵지를 핵심자산으로 우선순위화하여 제도화하는 등 핵심 제조 데이터 자산의 확보에 힘을 쏟아야 한다. 축적된 제조 역량과 현장 데이터야말로 글로벌 빅테크가 단기간에 따라올 수 없는 한국 피지컬 AI의 원천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피지컬 AI 생태계 확산이 유발하는 새 로운 고부가 소재·부품 수요를 선제적으로 포착하고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휴머노이드 로봇에 필수적인 초경량·고강도 복합재료와 고정밀 액추에이터용 소재, AI 데이터센터용 초고속·저전력 반도체 기판 소재, 그리고 전력망 확충에 동반되는 초고압 전력 케이블 소재 등 신수요 체인을 정부의 메가프로젝트와 직접 연계하여 초기 시장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3) K-제조 아키텍처 기반 통상 전략: 리스크 관리를 넘어 전략적 활용으로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패러다임이 과거의 비용 효율성 중심에서 제조시스템의 안정성과 회복 탄력성 확보 중심으로 급격히 이행함에 따라 이에 부합하는 다차원적 통상 전략의 수립이 시급한 시점이다. 주요국과의 산업적 연계성과 상호보완적 협력 구조를 균형 있게 분석함으로써, 우리 제조업의 글로벌 지위를 다져 나가는 새로운 접근법이 요구된다.
기술 우위 품목을 단순한 교역재로 취급하던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나, 글로벌 분업 구조 안에서 우리가 점유한 가치를 우리 산업의 전략적 위상과 발언권을 높이는 방향으로 연계하는 능동적 자산화(Active Assetization)로 관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 본질은 기술·생산능력·표준·현장 데이터 라는 개별 강점을 하나의 아키텍처로 결합해 지속가능한 경쟁우위로 육성하는 데 있다. 아울러 이렇게 육성된 대체불가 자산을 매개로 공급망 협력·시장진출 전략과 연계한 새로운 통상 전략을 수립하고, 한국이 부품 공급자를 넘어 글로벌 AI 기술 생태계의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
미·중 경쟁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블록화 심화는 이미 우리 통상환경의 상수가 되었다. 결국 관건은 다가오는 피지컬 AI 시대에 한국 산업의 대체불가성을 입체적으로 발굴·육성하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글로벌 공급망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모든 주요 교역 상대국에게 신뢰할 수 있는 협력 파트너로 자리매김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 산업연구원 조은교 경제안보·통상연구실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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